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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9. 04:11 - Clarendon

[일기] - 애교란 무엇인가

오늘의 일기 20150619

<애교란 무엇인가>





  오늘은 빌려야 할 책도 있겠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오늘 빌린 책


  학교에서 집까지는 한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 긴 시간보다 고역인 일은 사당에서 집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인파의 장엄한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다. 물론, 배차시간이 짧기 때문에 줄은 눈에 보이도록 쭉쭉 줄어들지만 그래도 지하철 역에서 나오자 마자 눈앞에 펼쳐진 콩자반 우글우글한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서울의 인구과밀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구나 이러다 지구가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괜스레 걱정이 될 정도인 것이다.(터지는 것은 서울뿐 일테지만)

  그 시장통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보자면 기막힌 타이밍에 버스에 승차하여 맨 앞자리, 통로부근의 자리를 차지하여 하차시 재빠르게 버스카드를 찍고 내리는 데서 오는 그런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것인데, 오늘따라 사람은 많고 날은 후덥지근하고 체력은 고갈되어 자리가 많은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거나 하는 사치따위는 생각도 못한 채 빈자리가 얼마 남지 않은 버스 위에 올랐다. 내 앞을 걸어가는 승객은 네명정도였고 빈자리는 제일 맨 뒷좌석의 가운데 세칸을 포함해 여섯자리 정도가 남아있었으니 나는 이번에도 자리선정의 묘미를 즐기려는(바퀴부근은 멀미가 나니까) 찰나의 여유도 없이 내게 허락된 빈자리가 보이자 마자 그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맨 뒷자린 정차시 위험하니까). 이왕이면 주변의 승객들이 조용하고, 어깨가 왜소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리 큰 욕심은 아니겠지만은 오늘은 왠지 조금 운이 없는 날인지, 여러 방면에서 신경이 쓰이는 승객 한명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내 오른쪽에 앉아있었다. 뭐랄까 첫인상으로는 몹시 ‘진지하게’ 생긴 20대 여성승객이었는데,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그 첫인상을 뒤집어 놓을 일이 일어났다.

  “이야아- 이야아아아-”

처음에는 무슨 정신적문제라거나 사소한 장애-예를 들어 틱이라거나-를 가지신 안타까운 분이신 줄 알았으나 입에 문 이어폰 핸즈프리마이크를 보고는(전역하니까 사람들이 다 이걸 입에 물고 있다) 그것이 ‘야’, 즉 친근한 관계의 상대방을 호출하는 행위였음을 안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야아- 이야아-’로 시작된 통화는 ‘가히 저것은 사회적 물의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콧소리와 ‘혀땰븐 툐리’로 변해가더니 종내는 저게 발음이 이상한건지 아니면 한국어를 배울 때 선생님을 잘못 골라 배운건지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서 불쌍한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까지 고민을 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애교-라는 것이었다. 집까지 가는 내내 그 사람의 콧소리를 들으며(동시에 헛소리이기까지 함) 나는 도대체 애교란 무엇인가, 귀여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고차원 적이고 본질적인(동시에 쓸모없기까지 함) 고뇌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오느을- 배가 고픈데에 막 차가운거 먹었더니 마악- 배가 아픈거 같애애-”(가장 현실적인 애교-콧소리는 ‘나꿍꼬또기신꿍꼬또’하는 식으로 언어를 ‘변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이고도 느린템포의 ‘박자’와 단어 사이사이의 ‘휴지’, 그리고 최소한의 어휘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듯 했다)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상대방의 마음 속에는 어떤 프로세스가 있는 것일까. 이 사태를 고역으로 인식할 것인가 혹은 즐거움으로 인식할 것인가. 이에 대한 반응으로 죽빵을 꽂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힐 것인가 오빵을 꽂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힐 것인가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왠지 나의 경우에 대입해 보니 나 또한 저런 상황에 많은 순간 맞닥뜨려보았음을 깨달았고 그리고 그것이 폭력을 지양하고 이성과 침착을 유지하는 지성인이 되고자했던 내 지난날의 지난한 노력들이고 뭐고 다 차치하고 야성의 죽빵을 불러일으키는 중차대한 일은 아니었음을 기억해냈다.오히려 그 반대라면 몰라도. 그는 분명히 저 애교-콧소리를 즐기고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여자 또한 상대방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모를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또한 아무 효용없는 짓거리를 하는데 자신의 피곤한 귀갓길을 모두 헌신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곧 깨달았다. 뭐랄까, 그러니까 저 둘은 놀라울 정도의 팀웍을 선보이며 합을 맞추는, 그래 마치 성룡과 이연걸 같은 프로들의 그런 스펙타클(그러나 별 의미없는)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략적인 사고과정은 다음과 같다.


  1.애교라는 것은 사실 언어활동으로서는 큰 효용을 지니지 않는다. 누수가 크고, 그 컨텐츠 또한 빈약하다. ‘점심에에- 팥빙수가-’는 분당 100원의 통화료를 낼 정도로 가치있는 정보는 아니니까. 그러나 저 짓거릴 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있어서 하고 있는 짓일 것이다.

  2. 그것은 아마 성욕-같은 것이 아닐까. 저런 애교-콧소리가 가지고 있는 특질이 수신자의 뇌 어느 특정 중추에 어떻게 이렇게 저렇게 작용을 해서(문송합니다) 성적욕구를 발현시켜 결국에는 혈액순환을 도모하고 그 혈액이 특정 부위에 어떻게 요롷게 조롷게 모여들게 하는(죄송합니다) 그런 게 아닐까. (이 추론은 귀납적 추론과정을 거쳤습니다.)

  3.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성욕의 트리거가 되는 걸까. 혀땰븐 ㅌ효리와 느릿느릿한 말투, 빈약한 어휘력이 상징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보편적으로 저런 애교에 반응하는 보편다수의 남성들이 소아성애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4. 다시한번 귀납적 추론과정을 거쳐 내 여러 자아들과 논의한 결과 그렇지는 않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왜냐하면 실제로 저런 애교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소아성애적 성향이 다분한 사람이 있기는 할테지만 그 수가 그리 의미있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아무 관련없다는 말이다. 아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면 확실한 대조군인 ‘나’는 그렇지 않다. 어린 말투를 쓰는 어린 애 보다는 어린 말투를 쓰는 어른이 훨씬 섹슈얼하다. 남성의 성욕이 2차재생산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보다는 후자가 섹슈얼한 것이 합당하다.

  5. 그렇다면 다시, 그럼 저 말투와 음역대는 뭐란 말인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건 바로 ‘연약’이 아닐까. 어린아이같은 연약함. 동시에 연약하기 때문에 충분히 남성이 자신감과 욕심을 부려도 되는 상황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힌트-떠보기인 것이다. 이것은 암묵적 합의를 거친 일종의 언어 규약이다....!


  애교란 일방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애교의 주체가 대상에게 일방적인 송신으로 애교를 날린다면(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것은 수신자에게 도착할 때 쯤 이미 폭력으로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강력한 스매싱이 되는지 아니면 길고 긴 랠리의 서막을 알리는 서브가 되는지는 수신자의 몫이 된다. 수신자측이 이 언어활동이 일반적인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애교가 발생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는 이미 있으므로), 송신자의 머리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 이것이 일종의 놀이임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되고 나서 이 활동은 ‘애교’로 정의된다. 애교로 정의된 순간부터 송신자는 ‘귀여운 사람’이 되고 수신자는 ‘귀여워하는 사람’이 된다. 귀여워하기 때문에 일련의 대화는 표면적의미 속에 심층적인 의미를 숨겨놓은 고차원의 암호체계가 된다. (여기서 내가 고차원의 암호 운운한 것은 표면적인 의미와 심층적인 의미 간에 어떠한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암호는 관련이 없을 수록 좋은 암호라고 구글 가입화면은 이야기 하고 있다.) 물론 생각해보자면 논의할 거리들은 수도 없이 생겨날 테지만 여기서 건질만한 생각이라면 바로 애교와 성욕의 관계가 아닐까한다. 인간이 애교에 성욕을 느낀다는 사실이 가지고 있는 두가지 진실말이다.

  ‘애교’는, ‘귀여운 짓’이라는 것은 결국 까놓고 말하자면 ‘너도 할 수 있음’,’가능성’을 의미한다. 동시에, ‘귀여워 하는 사람’은 성욕을 느끼는 데 있어서 가장 최고의 유전자, 혹은 나의 DNA와 비교하였을 때 동일성에 있어서 가장 먼 위치에 있는 유전자여서 2세에게 좋은 유전형질을 고루 나누어 줄 수 있는 상대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성욕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언제나 전시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사람이랄까 전천후의 사람이랄까. 유도리의 사람이랄까. 어떻게 쉴드를 쳐야할까)

  여기에 더해, 또 알 수 있는 사실 : 인간은 귀여움을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성공적으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고의 유전형질을 찾아 2세를 낳는다는 생각은 과하게 이성적이고 ‘귀여움’에서 나타나는 자연의 본성은 이렇다.


  귀여운 사람의 경우 : 애교의 차등적 지급으로 우수한 유전자에게 가능성을 비치고 자칫 일방적일 수 있는 배우자 선택에 밸런스를 부여한다!(대부분 여성은 남성의 선택을 수동적으로 받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임. 물론 여기서 여성과 남성을 치환해도 성립. 사회적 권력이 우위에 있는 사람을 여기서는 편의상 ‘남성’으로 친 것임.)

  귀여워하는 사람의 경우 : 가장 접근 가능성이 큰 이성. 그중에서 가장 나은 이성에게로 끌린다. (홀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호간의 합의를 따른 것에 불과함)


이를 두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절대 안된다. 만일 이런 메커니즘으로 성욕을 느끼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에게만 성욕을 느꼈다면 인류는 애저녁에 멸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에 다다랐을 때 쯔음에 나는 집 앞의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걸 일기로 다 썼을 땐 새벽 네시였다.


아 오늘도 훌륭한 개소리를 썼다^ㅁ^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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